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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무엇인가

  2011년 2학기 Project2 주택을 설계하기 위해서 이 주제를 택하게 됐다. 주어진 사이트가 자연 안에 있기 때문에 자연을 나만의 정의를 통해서 정한 뒤 설계를 진행 하고자 한다.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하고자 하면 습관적으로 사전에서 먼저 정의를 찾는다. 사전에서 찾은 자연은

1.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2.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생겨난 산, 강, 바다, 식물, 동물 따위의 존재. 또는 그것들이 이루는 지리적·지질적 환경.

3 (일부 명사 앞에 쓰여)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

4 [철학]사람과 사물의 본성이나 본질.

5 [철학]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의 전체.

6 [교육] 같은 말 : 자연과.

  정의라는 것은 하나의 약속이다. 사람들 간의 약속을 통해서 그것을 정의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나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서 보편적이기 보다 특성에 맞는 정의를 하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는 자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자연의 치유이다. 자연은 스스로의 치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책을 읽을 적이 있다. 이것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자연이 태풍이 일어나고 자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했다. 그 만큼 자연은 자신의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정화의 기능, 유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부조화를 이룬다면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 움직인다. 이것은 사람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다. 사람은 아파도 스스로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 약의 도움을 받지만 사람의 상처는 스스로 고쳐지고 아픈 것이 사라진다. 사람도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고, 자신 자신의 몸의 조화를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태어났을 때 사람 본래의 모습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의 치유 과정 중에 재미있는 과정이 한 가지 있다.

이러한 자연적 치유의 기능을 ‘캥거루케어’라는 방법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캥거루케어란 엄마의 아기를 가슴에 안는데 아기와 서로 피부를 완전히 맞대고 안음으로써 아기의 정서안정과 발달을 돕는 케어 방법이다. 이 캥거루케어는 1983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시작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는 부족한 인큐베이터를 대신해서 미숙아를 케어하는 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현재는 선진국에서 폭넓게 시행되어서 신생아의 사망률을 크게 줄이고 미숙아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바로 엄마품에 그대로 안겨서 얼마정도 있게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기는 안정을 찾고 또 엄마젖을 찾아서 빨기 시작한다. 이는 엄마와의 피부접촉을 통한 캥거루케어를 함으로써 아이와 엄마의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모유수유를 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캥거루케어에 대한 유명한 실례로 호주에서 태어 난지 얼마 안되서 사망선고를 받은 아기가 있었는데, 엄마가 작별인사를 하기위해서 자기 가슴위에 그 아기를 올려놓자 몇 분후에 아기의 호흡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엄마의 따뜻한 체온이 그 어떤 기계장비보다도 아기를 안정시키고 적응시키기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최고란 것이다. 엄마의 맨살에 아기의 맨살이 닿는 이 캥거루케어의 핵심은 바로 배꼽부터 가슴까지 맨살을 밀착시키는 것이다. 피부가 맞닿을 때 특수 감각 섬유를 자극해 뇌에 쾌락신호를 보내고 이는 뇌성엽피질로 이동해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된다. 이 옥시토신을 뇌간으로 가서 부교감 신경 통제를 증가시켜 아기를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캥거루케어를 받는 아이에게 주사를 놓거나 해도 아기는 울지 않는다고 한다. 고통을 감소시켜주기 때문이다. 캥거루케어는 돈이 들거나 어렵거나 한게 아니고 그저 따뜻한 엄마 아빠의 품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로하스베이지 연구소 출처)

  이렇게 캥거루 케어도 자연의 섭리를 따를 때 치유의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연 그 자체가 치유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처럼 우리는 자연의 섭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섭리란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 대해서 원리와 법칙을 찾으면서 연구한다. 그 만큼 우리는 자연을 알고자 한다. 자연의 섭리에 대해서,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인간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있는가 자연의 섭리를 함께하고 있는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을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을 주체라고 생각 했을 때,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정복자가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다양한 관계가 된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대표되는 정복자와 친구관계에 대해서 살펴 볼 때, 정복자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욕심에 의해서 정복의 이미지가 들어난 모습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자기의 필요한 만큼만을 자연에서 취했다면, 점점 기술이 발전하고 전쟁을 하고 물자의 욕심이 생김에 따라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반대로 친구의 이미지 우리는 자연을 속박시키기보다 자연을 때로는 이용을 한다. 등산을 하면서 자연에서 치유를 얻기도 하고, 자연의 물을 통해서 스포츠를 즐기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에서 충분한 먹을거리와 자원을 얻는 다는 것이다. 정복자의 입장일 수도 있지만 필요한 만큼만을 취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만큼 자연 자체를 착취라는 단어보다 활용한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자연을 인간의 활용측면에서 생각할 때, 인디언의 한 부족에 관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내용은 아직도 잊혀 지지도 않고 내가 평생 가슴속에 담아둘 가치관이 되었다. 그 내용은 인디언은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은 낭비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마리의 동물을 잡았으면 그 털에서부터 고기를 모두 사용하고, 그 힘줄까지 이용해서 활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인디언들의 사고방식은 내가 구한 자연에 대해서 이용을 최대한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에서 바탕이다. 이건은 건축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 최근 건축물들을 보면, 필요 없는 구조물과 허세가 담긴 구조물에 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그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할 수 는 없었지만 나는 그런 건축이 싫다. 건축가도 자연에 대하 예의가 필요하다. 나무가 됐든, 콘크리트가 됐든, 자연에서 온 모든 재료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우리는 지어야 한다. 필요하지 않는 재료를 멋대로 장식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재료 자체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건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건축에 대한 생각에 대한 설명의 좋은 예시를 통해서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벌써 말했는지 모르지만, 아니 말했을 것이다. 나는 건축을 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과정과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건축가의 다른 어원은 창조자이다. 이것이 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건축가를 창조자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한다. 여하튼, 건축을 하는 것을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형태, 장식,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 설명 할 수 있다. 건축에서 내가 어떠한 형태가 좋다고 그 형태에 따라서 하고, 아무 장식이나 아름답다고 그 장식을 달아서 건축을 한다면 지어질수 있지만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눈이 등 뒤에 필요하다고 해서 등 뒤에 달고, 손이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해서 손을 하나 더 달면 더욱더 괴물이 될 것이다. 그만큼 건축이든 사람이든 좋다고 해서 만든다면 그것은 괴물에 불과하다. 사람의 신체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여기에서는 일단 몸의 형태를 가지고 말 하겠다. 사람의 손가락이 5가지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가장 힘을 강하게 쥘 수 있다고 한다. 만약에 하나의 손가락이 없으면 생활은 할 수 있으면 급격하게 힘이 떨어진다. 그밖에도 사람의 발의 길이, 머리에 대한 사람의 비율 모든 것이 완벽한 비율과 완벽한 기능에 의해서 움직인다. 절대 필요하지 않는 것은 몸에 달려 있지 않다. 눈썹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지만 눈썹이 없다면 물은 눈으로 곧바로 흐를 것이다. 귀 바퀴가 없다면 소리를 모으지 못할 것이다. 입 위에 코가 위치하지 않는 다면 그 음식이 상했는지 냄새로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하나가 이유가 있고 완벽한 비율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과 마찬 가지로 신이 우리는 무엇인가로 만들 때, 절대 필요 없는 것을 만들지 않았듯이, 우리도 창조자의 입장으로서 자연을 이용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자연을 낭비하면 안된다. 그것은 괴물을 만들기도 하고 자연의 재료를 소멸시키고 예의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자연의 재료를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활용할 때 자연의 섭리, 법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들의 경우도 자신이 먹을 만큼 이상을 욕심을 내지는 않는다.

  자연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서 자연에 대해서 도출해 내야 하지만 나는 이정도의 나의 생각을 통해서 자연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은 내가 그것을 이용할 때 그것이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하나의 높이로 측정을 한다면 우리가 발로 오를 수 있는 자연의 대상이 있고, 우리보다 엄청나게 높고 큰 자연이 존재 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자연은 우리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산을 등산을 위해서 이용을 한다면, 산은 내게 말한다. “자 넓게 경치가 보이고, 자연이 아름답지?” 하지만 내가 산을 착취하게 된다면, 최근 일어나 우면산사태 처럼 산이 말한다. “이거나 먹어라” 우리가 자연 그 자체를 이용할 때 그것이 자연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흙을 쌓아 올려서 산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 산이 아닌 것이다. 과학적으로 뛰어난 인큐베이터가 아무리 좋아도, 어머니의 가슴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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